"犬子熊孫(견자웅손)"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 남우세스런 말이 처음 나온 건 다름 아닌 일제시대다. 대체 어디 쓰인 말일까. 조선인을 비하하기 위한 일제의 욕이었을까?
신간 < 한국사 콘서트 > (두리미디어. 2008)에 따르면 견자웅손은 조선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했을 때다. 느닷없이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라는 요구에 민족은 치를 떨었다. "죽음을 택할지언정 성은 바꾸지 않겠다"며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견자웅손은 그 와중에 나왔다. 창씨개명 정책을 조롱하기 위해 망측한 뜻의 성을 신청한 것. 이 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개똥이나 먹으라'는 뜻의 견분식위(犬糞食衛)라는 성을 내기도 했다.
병하(炳夏)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전농(田農)이란 창씨를 신청했다. 이는 일본어로 '덴노 헤이카(천황폐하-天皇陛下)'와 발음을 같게 해, 창씨개명 정책을 비웃은 사례다. 모두 요즘 네티즌들이 정부 정책을 비꼴 때 사용하는 다양한 댓글에 뒤지지 않는 센스다.
그러나 반항에는 탄압이 따르는 법. 이런 해괴한 창씨를 신청한 사람들은 창씨를 모독했다며 퇴짜를 맞은 것은 물론 경찰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창씨개명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자. 창씨개명은 친일파의 전유물로 인식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친일파라고 전부 창씨개명을 한 건 아니었다.
정미 7적으로 꼽히는 이병무나 일본 육군 중장을 지냈던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려 일제에 저항한 건 아니었다. 일제가 의도한 결과였다.
당시 일제는 친일파를 앞세워 창씨개명을 선전했다. 춘원 이광수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창씨의 동기'라는 글을 써 창씨개명에 앞장섰다.
"내가 향산(香山)이란 씨를 창설하고 광랑(光郞)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고친 동기는 황공하고도 위대하신 천황 폐하의 존명(尊名)과 '읽는 법'이 같은 씨명을 가지려고 한데서부터다."
하지만 일제는 일부 이름난 친일파들에게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이 강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그야말로 교활한 술책이 아닐 수 없다.
------------------------------------------------------------------<여기까진 퍼온글>-------------------------------
창씨개명은 황국신민화 정책의 완성편이었으며 전쟁에 필요한 인적 동원인 징병제에 대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1939년 11월20일 창씨개명의 법적 근거가 된 '조선민사령' 제3차 개정안이 통과되자 한국 전역에서는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이 개정안은 사위도 양자가 될 수 있고, 여자가 시집가면 남편성을 따르고, 또 조상대대로 내려온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었으니 한국인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11일부터 6개월 동안인 8월11일까지 실시되었는데, 일본은 이름을 바꾸지 않는 학생은 학교에서 퇴학시키거나 심지어는 우편물, 소화물을 배달해주지도 않았으며 도항권도 발급하지 않는 등 심하게 압력을 가하였다. 한국인들은 갖은 압력과 협박끝에 마지못해 창씨를 하면서도 대부분의 문중에서는 그래도 자기들의 성을 지키기 위해 '본래 김씨였다'는 의미에서 '金本OO'이나 '金原OO'으로 하거나 아니면 본관을 살려서 '金光OO(광주김씨)', '金江OO(강릉김씨)'으로 했다.
특히 과거 조선의 세도가에서는 문중회의를 열어 새로 창씨를 한다음 가문 전체가 이를 사용하도록 했다.
어떤 이는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뜻에서 풍자적인 창씨명을 제출했다가 수모를 겪기도 했다.
즉, 성을 바꾸었으나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며 '견자웅손(犬子熊孫)'으로 창씨계를 제출했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으며 또 어떤 학생은 일본 황족 '약송궁(若松宮)'의 '若松'을 성으로 하고 일왕 '유인(裕仁)'의 '仁'자를 취해 '약송인(若松仁)'으로 창씨개명했다가 불경죄에 걸려 경찰에 잡혀가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더 큰 피해를 막기위해 할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것이 보통이다. (비상, 한끝 고등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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