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과 犬子熊孫(견자웅손)

[책속에이런일이]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 [북데일리/김대욱] 파이미디어 | 2008.10.21


"犬子熊孫(견자웅손)"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 남우세스런 말이 처음 나온 건 다름 아닌 일제시대다. 대체 어디 쓰인 말일까. 조선인을 비하하기 위한 일제의 욕이었을까?

신간 < 한국사 콘서트 > (두리미디어. 2008)에 따르면 견자웅손은 조선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했을 때다. 느닷없이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라는 요구에 민족은 치를 떨었다. "죽음을 택할지언정 성은 바꾸지 않겠다"며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견자웅손은 그 와중에 나왔다. 창씨개명 정책을 조롱하기 위해 망측한 뜻의 성을 신청한 것. 이 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개똥이나 먹으라'는 뜻의 견분식위(犬糞食衛)라는 성을 내기도 했다.

병하(炳夏)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전농(田農)이란 창씨를 신청했다. 이는 일본어로 '덴노 헤이카(천황폐하-天皇陛下)'와 발음을 같게 해, 창씨개명 정책을 비웃은 사례다. 모두 요즘 네티즌들이 정부 정책을 비꼴 때 사용하는 다양한 댓글에 뒤지지 않는 센스다.

그러나 반항에는 탄압이 따르는 법. 이런 해괴한 창씨를 신청한 사람들은 창씨를 모독했다며 퇴짜를 맞은 것은 물론 경찰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창씨개명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자. 창씨개명은 친일파의 전유물로 인식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친일파라고 전부 창씨개명을 한 건 아니었다.

정미 7적으로 꼽히는 이병무나 일본 육군 중장을 지냈던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려 일제에 저항한 건 아니었다. 일제가 의도한 결과였다.

당시 일제는 친일파를 앞세워 창씨개명을 선전했다. 춘원 이광수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창씨의 동기'라는 글을 써 창씨개명에 앞장섰다.

"내가 향산(香山)이란 씨를 창설하고 광랑(光郞)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고친 동기는 황공하고도 위대하신 천황 폐하의 존명(尊名)과 '읽는 법'이 같은 씨명을 가지려고 한데서부터다."

하지만 일제는 일부 이름난 친일파들에게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이 강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그야말로 교활한 술책이 아닐 수 없다.

------------------------------------------------------------------<여기까진 퍼온글>-------------------------------


창씨개명은 황국신민화 정책의 완성편이었으며 전쟁에 필요한 인적 동원인 징병제에 대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1939년 11월20일 창씨개명의 법적 근거가 된 '조선민사령' 제3차 개정안이 통과되자 한국 전역에서는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이 개정안은 사위도 양자가 될 수 있고, 여자가 시집가면 남편성을 따르고, 또 조상대대로 내려온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었으니 한국인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11일부터 6개월 동안인 8월11일까지 실시되었는데, 일본은 이름을 바꾸지 않는 학생은 학교에서 퇴학시키거나 심지어는 우편물, 소화물을 배달해주지도 않았으며 도항권도 발급하지 않는 등 심하게 압력을 가하였다. 한국인들은 갖은 압력과 협박끝에 마지못해 창씨를 하면서도 대부분의 문중에서는 그래도 자기들의 성을 지키기 위해 '본래 김씨였다'는 의미에서 '金本OO'이나 '金原OO'으로 하거나 아니면 본관을 살려서 '金光OO(광주김씨)', '金江OO(강릉김씨)'으로 했다.

특히 과거 조선의 세도가에서는 문중회의를 열어 새로 창씨를 한다음 가문 전체가 이를 사용하도록 했다.
 
어떤 이는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뜻에서 풍자적인 창씨명을 제출했다가 수모를 겪기도 했다.

즉, 성을 바꾸었으나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며 '견자웅손(犬子熊孫)'으로 창씨계를 제출했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으며 또 어떤 학생은 일본 황족 '약송궁(若松宮)'의  '若松'을 성으로 하고 일왕 '유인(裕仁)'의 '仁'자를 취해  '약송인(若松仁)'으로 창씨개명했다가 불경죄에 걸려 경찰에 잡혀가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더 큰 피해를 막기위해 할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것이 보통이다. (비상, 한끝 고등국사)


이륭양행과 George L Show

조지 쇼오의 체포


『아리랑』에서의 김산의 진술대로, 일제는 1920년 7월 11일 신의주에서 쇼오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1922년 6월 조선총독부 경부국 발행 「조선치안상황(국외)」의 ‘영국인 쇼우 사건’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어, 일제의 조지 쇼오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성질이 남과 잘 어울리지 않고, 또 이기심이 커서 취리를 위해서는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가장 열등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더욱이 평소에 치열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일본인을 마치 사갈(蛇蝎)처럼 싫어하고, 항상 감정이 격해 있어 평정을 잃는 경향이 있다. 특히 본인은 아일랜드인인 관계로 조선의 현황에 동정하는 한편, 자기의 이욕심(利慾心)을 만족시키기 위해 구한국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불령선인을 이용하여 이기를 얻으려 꾀하였다.

  그는 자기의 현주지에 대한 일본제국의 법권이 미치지 못함을 기화로 하여 대한 임시정부․대한청년단연합회 및 기타 단체의 불령선인들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대정 8년 7월 경부터 이듬해 대정 9년 7월 상순까지 개요 다음과 같은 언동을 감행하였다.


1. 자기 소유의 거택․점포․창고의 일부를 불령선인에게 대여하여 독립운동에 편의를 주었다. 불령선인들은 이 집에 안동교통사무국을 설치하여 쇼우의 비호 아래 제1차 국장 선우혁, 제2차 국장 홍성익, 제3차 국장 양준명, 제4차 국장 장덕로 등이 잇따라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와 한국 내지와의 연락․교통에 종사하고 불온문서 및 위험물 수송을 맡아 했던 것이다.


2. 자기 관리에 속하는 선박을 공급하여 불령선인의 상해․안동간의 왕복 및 무기․탄약․불온문서 등의 운반을 방조하였다. 즉, 이륭양행 소유 기선 계림호는 상해임시정부 비서국장 겸 주계국장 고일청 외 수명의 불령선인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쇼우는 육상에 있어서의 일본 관헌의 경계가 엄중함을 알고 고일청 일행의 상륙의 위험함을 느껴 교묘히 그의 상륙을 저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관헌에 대하여 불령선인이 배에 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하류 대동구 앞바다에서 일부를 상륙시키는 등, 극력 불령배를 비호함으로써 체포를 면하게 한 사례가 있다.


3. 대정(大正) 8년 8월 자기 주택 또는 점포의 일부에 잠복한 상해임시정부 재무원 주현칙이 군자금으로서 한국내에서 모은 돈을 상해로 보내는데 있어, 자기가 미리 상해 회풍은행과 거래가 있음을 기화로 액면 1천 218원 75전의 수표를 발행하여 편의를 주어 송금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였다.


4. 대정 9년 2월 23일, 자기 점포의 일부에 잠복한 상해임시정부 안동교통사무국장 홍성익이 안동 신시가에서 일본 경찰 관헌에게 체포되자, 쇼우는 스스로 그 전말을 상해 임시정부에 타전하고, 후임자를 급속히 파견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 결과 후계자로 양준명이 급거 내착할 때까지 대한청년연합 편집부장 성석련을 자택에 잠복시켰다.


  위는 다만 그 일례를 든데 불과하지만, 이처럼 모든 수단방법을 써서 불령선인을 비호하고 그들의 운동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봉천에 있는 영국 영사는 그 무모함을 충고하였으나, 그는 완고히 이를 듣지 않고 더욱 더 횡포를 더하였다.


  1920년 8월 6일 경성고등법원 검사장은 쇼오 사건의 연루자 24명과 함께 쇼오를 내란 피고사건으로 기소하였다.(일본 외무성 자료)”


  쇼오를 둘러싼 영․일의 갈등


  그러나 일제의 쇼오에 대한 기소는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영국의 항의로 외교마찰을 초래했다. 영․일정부는 쇼오 문제로 수개월간 지루한 협상을 했으며, 결국 그 해 11월 4일 쇼오를 보석으로 석방하기로 합의했다. 다음은 이 사건에 대한 일본 외무성 자료의 한 부분이다.


  “주로 영․일동맹의 우의를 중하게 여기는 견지에서 본건을 사실상 해결하고자 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에 대해서는 전술의 이유에 비춰 쇼우에 대해 보석을 허가해 줄 바를 지적하여 그 의견을 물었는 바, 동부에서도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여 피고인 쇼우로부터 보석 청구가 있을 때는 조선총독부는 검사에게 보석허가의 의견을 내겠다는 것을 승낙하였다. 단 보석을 허가하든지 안하든지의 결정은 물론 재판소의 전권에 속하는 바로,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회답이 있었다.

  11월 2일에 이르러 영국대사는 본국정부의 조령에 기초하여 보석에는 반대하고 무조건 석방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제국정부는 그 입법근본주의상 및 사법권의 독립유지상 그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보냈다. 그로부터 먼저 쇼우는 증거 취조상의 사고를 일으켰고, 장기수감에 의해 신체가 쇠약해졌다는 것을 이유로 재삼 보석을 요구해 11월 4일 경성고등법원 예심판사는 법률에 근거하여 보석금 1,500원을 내도록 하고 보석을 허가해 석방하였다.”


  쇼오는 석방된 후 안동으로 돌아와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으며, 1921년 1월 26일에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및 안창호 등이 베푼 환영연에 참여하고, 이후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어울리며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경찰의 정보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조선치안상황」)


  “쇼오가 대정 10년 1월 상해로 도항하였을 때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대소 2개의 금색 공로장을 받았다고 하며, 동년 11월 경에는 그 작은 것을 가슴에 달고, 조선 독립은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하며 득의만면한 바 있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사건에도 관여했었다고 하는데,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출처] 조지 쇼오 찾기|작성자 김학민



2001년 조지 쇼오 찾기


  나는 1999년 가을 조지 쇼오를 소재로 한 장편(이 책은 「슬픈 아일랜드」라는 제목으로 2000년 8월에 출간되었다)을 구상하고 있던 소설가 윤정모씨의 부탁으로 이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게 되었다. 윤정모씨는 『백범일지』와 『장강일기』에 붙인 쇼오에 대한 나의 주석을 읽고, 내가 이 전설적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나, 나는 그 주석 이상은 알지 못했다.

  이후 어렵사리 ‘불온인물 조지 쇼오’에 대한 일제 경찰의 자료들을 구해 볼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1920년 이후 그의 행적 및 후손들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일본 경찰 자료에 의하면, 그는 일본인 부인과 사이에 아이를 둘 두었다)

  로이드보험사사(社史)를 통해 쇼오가 운영했던 이륭양행의 본사인 태고선박회사가 1832년 홍콩에서 설립된 자르딘 매터슨(Jardine Matheson)사였음을 알아냈고, 이 회사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음을 인터넷으로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이 회사에 이륭양행 및 안동과 상해 사이를 운항하였던 계림호, 쇼오에 대한 자료를 보내 달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6월에는 어렵게 떠난 유럽 여행길에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아일랜드에서 수소문 끝에 더블린 대학에서 운영하는 ‘아일랜드인 가계찾기 서비스’(IGRS)가 있음을 확인하고, 조지 쇼오의 가족이나 후손을 찾아달라고 신청하려 했으나, 주머니 가벼운 배낭여행객으로서는 377달러의 수수료가 부담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어 지금껏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중에 윤정모씨로부터 쇼모의 6촌 정도 되는 친척 한 사람이 런던에 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출처] 조지 쇼오 찾기|작성자 김학민

[아] 이륭양행
임시정부 교통국의 안동지부가 있었던 무역회사.

이륭양행은 한국독립운동에 깊은 동정을 가지고 있는 아일랜드 사람 G.L.쇼(중국명 蘇志英)가 경영하는 무역상으로, 임시정부는 국내와의 통신연락·군자금 모금활동에 이 회사 선편(船便)을 이용하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일랜드 사람인 죠지 엘 쇼우(George L. Show)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자기의 조국과 같은 처지에 있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최대한 지원하기 위하여 교통국 안동지부를 자기 집에 두었다. 그리하여 당시 해외로 망명하던 인사는 그의 혜택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서울에서 상해에 갈 때도 경의선으로 신의주를 거쳐 일단 안동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에 은신했다가 교통국지부의 안내를 받았던 것이다

1